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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생성소/독서감상문

임레 케르티스 - 운명 3부작(운명, 좌절,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송가) 中 운명

 

 

 

아우슈비츠의 굴뚝에서조차도 고통들 사이로 잠시 쉬는 시간에

행복과 비슷한 무엇이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내게 악과 '끔직한 일'에 대해서만 묻는다.

내게는 이런 체험이 가장 기억에 남는데도 말이다.

그래, 난 사람들이 내게 묻는다면 다음엔 강제 수용소의 행복에 대해서 말할 것이다.

사람들이 묻는다면.

그리고 내가 그것을 잊지 않고 있다면

극한의 상황에서 삶의 의지를 잃지 않는 것,

살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는 것,

이것만으로도 행복하다

 

- 케르티스의 운명 中

 

 

    문재인의 운명을 읽고 싶어서 인터넷을 검색하던 중 우연히 임레 케르테스 '운명' 이라는 명저가 눈에 들어왔다. 내 주 관심을 끌었던 점은 '운명' 이 나치 유대인 수용소에서 노역하는 한 아이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전쟁광(전쟁 덕후<미화하자면 역사 덕후>)인 나로선, '나치 SS(나치 친위대)[각주:1]의 홀로코스트를 더 자세히 알 수 있겠다' 라는 생각에 바로 빌려서 읽었다.

 

   케르테스의 운명은 내가 생각했던 '나치의 잔혹성'을 폭로하는 소설이 아니었다. 오히려 케르테스가 인간이 처할 수 있는 극한적인 상황을 너무나 담담하게 표현해 나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아래에 그 내용을 간단히 소개하겠다.

 

       /////////////////////// //스포일러 주의 ////// /////////////////////////////

 

   케르테스는 헝가리에 살고 있는 15살 유대인이다. 자신이 가슴에 달고 있는 별 모양의 뱃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히틀러를 위시한 나치 친위대(SS)에게 유대인들이란 어떤 존재인지 모른채 살아가는 케르테스는 천방지축 개구쟁이이다. 그는 자기 옷에 달려있는 별 배지가 멋있다고 자랑스러워하며, 독일군이 세련되고 인정이 많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런 그의 무지함이 오히려 독자들의 코를 찡하게 하는 것 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세상 물정 모르는 케르테스도 자신이 유대인이기 때문에 받는 사람들의 시선, 차별 때문에 괴로워한다. 그래서 그는‘아 유대인들은 이런 차별을 받아도 되는 존재야. 나는 유대인으로 태어났으니 이런 '죗값' 은 숙명으로 받아들여야지’라는 운명론을 굳게 믿게 된다.

 

    하지만 케르테스가 영문도 모른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끌려가게 된 후 그는 ‘유대인으로서의 숙명’에 대한 의문을 품게 된다.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이런 죄값을 치뤄내야 한다는건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Non scolae, sed vitae discimus(학교를 위해 공부하지 말고 인생을 위해 공부하라'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이런 의문이 들었다. 교장선생님의 말대로라면 나는 아우슈비츠에 대해 공부를 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이 모든 상황을 명백하게, 솔직하게,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4년동안 학교에서 한번도 아우슈비츠라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 임레 케르테스의 운명 中-

 

   그리고 그는 이 곳에서 자신의 불운한 운명을 탓하며 자살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수동적인 운명관에서 벗어나 ‘내가 내 운명을 개척한다’는 자유 의지의 운명관을 갖게 된다. 이런 자유의지는 그를 '극단적인 상황에서 동물과도 같은 본능만 남은 인간' 이 아닌 '내일(해방)이 기다려지고, 생을 끊으라는 운명의 명령에 굴복하지 않는 인간'으로 변모시켰다.  그는 자유의지를 갖고 있어야만 자신을 보호할 수 있고, 살아가는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며 자신의 생명을 하나의 여정으로 여기게 됐다.

 

그리고 독일의 무조건 항복으로 모든 수용소의 유대인들이 해방된 후..........

 

    케르테스도 다른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조국인 헝가리로 돌아가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을 동정하는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느낀다. 사람들이 케르테스의 '여정'을 단순히 끔직한 과거로 치부했기 때문이다. 케르테스는 유대인들이 겪은 모든 참극을 모리아이 자매[각주:2]의 저주로 여기는 사람들에게 싫증을 느꼈다.

   

"어느 수용소에서 왔니?"

"부헨발트요"

남자는 그곳에 대해 알고 있다면서 '나치의 지옥들 가운데 하나'로 들었다고 말했다.

"그 놈들이 너를 어디서 끌어갔니?"

"부다페스트에서요"

"그곳에 얼마나 있었니?"

"일년 정도요."

"끔직한 일들을 많이 보았겠구나."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중요한 건 이제 다 지나갔다는 거야"

남자는 밝은 표정으로 방금 지나친 집들을 가리키더니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느낌이 어떤지 물어봤다. 예전에 떠났던 도시를 이렇게 보니 감회가 어떠냐느 것이었다.

"증오스러워요"

남자는 잠시 입을 다물더니 내 감정을 이해할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상황에 따라서는 증오도 적당한 자기 자리와 역할이 있고 유용할 때가 있다고 덧붙였다. 이 점에 있어선 우리 두 사람의 생각이 같다면서 내가 누구를 증오하는지 알고 시다고 했다.

"모두요"

이번에는 꽤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끔찍한 일들을 많이 겪었니?"

그건 끔찍하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린 문제라고 내가 답했다. 그러자 남자는 약간 편치 않은 표정을 지었다.

"모든 게 부족한 그곳에서 심하게 굶주리고, 얻어맞은 모양이구나"

"당연하죠"

남자는 서서히 인내심을 잃어 가는지 이렇게 소리쳤다.

"얘야, 어째서 넌 모든 것을 당연하다고 말하는 거니? 도대체 그럴 수 없는 일인데도 말이야!"

나는 강제 수용소에서는 그런 일들이 당연한 거라고 대답했다.

"그래, 그래, 그곳에선 그랬겠지.. 하지만........,,"

남자는 여기서 말을 멈추더니 한동안 머뭇거렸다.

"하지만 내 말은 강제 수용소 자체는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거지!"

남자가 머뭇거리면서 결국 찾아낸 말이 이 말인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이 말에 대해 아무 대꾸를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어떤 특정한 일에 있어선 낯선 사람들이나 그 일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들, 그리고 어떤 면에선 철모르는 어린아이들하고는 아예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게 좋다는 걸 서서히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낯익은 광장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얼른 내려야 한다는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나는 아무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남자는 갑자기 내게로 몸을 돌리면서 물었다.

"네가 겪은 일들을 말해 주지 않겠니?"

나는 조금 의아해하면서 남자에게 들려줄 만큼 그렇게 특별한 이야기는 없다고 말했다. 내 말에 남자는 희미하게 웃었다.

"나한테가 아니고 세상에 알리라는 거야."

나느 그 말에 더 놀라고 궁굼했다.

"뭘 알리라는 거에요?"

"수용소의 지옥에 대해서"

나는 지옥에 대해 전혀 모를 뿐 아니라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 별로 할 말이 없다고 말했다.

남자는 단순히 비유였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물었다.

"강제 수용소를 지옥으로 상상하면 안 된다는 말이니?"

나는 군화 뒷굽으로 땅바닥 위에 동그라미를 그리면서, 누구나 마음대로 상상은 할 수 있겟지만, 내 경우에는 오로지 강제 수용소만을 상상할 수 있다고 말했다. 강제 수용소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지옥은 전혀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한번 상상해 본다면?"

남자가 다그쳤다. 나는 몇 개의 동그라미를 더 그린 뒤에 입을 열었다.

"그럼, 전 지옥을 전혀 지루해할 수 없는 곳으로 상상할 거에요."

그러나 강제 수용소는, 심지어 아우슈비츠 같은 수용소도 특정한 조건하에서는 지루해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남자는 잠시 말이 없었다. 내 눈에는 약간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비쳤다.

"그래, 네 말대로 그렇다고 치자. 그럼, 그걸 뭘로 설명하겠니?"

나는 잠깐 뜸을 들인 다음 대답했다.

"시간으로요."

"시간으로라니? 무슨 말이지?"

"시간이 도움이 된다는 뜻이에요."

"도움이 된다고? 어떤 면에서?

"모든 면에서요."                                              -케르테스 운명 中-

 

(위 대화 내용은 케르테스와, 케르테스를 이해못하는 다수의 사람들 중 한명과의 대화)

 

    이 대화 후 케르테스는 자신이 수용소에서 보낸 시간을 잊어버려야 미래를 꿈꿀 수 있다고 위로해주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가치관을 피력하면서 이 소설은 끝을 맺게 된다.

 

"나는 그 끔직한 일들을 전혀 느끼지 못했습니다."

노인은 내심 무척 당황해하는 것 같았다. 이어 두 사람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물었다. 그러나 내가 먼저 두 사람에게 그 어려웠던 시절에 무엇을 했느냐고 되물었다. 한 사람이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이렇게 답했다.

"그거야...... 우린 그냥 살았지."

이 말을 받아 다른 사람이 덧붙였다.

"우린 살아남기 위해 애를 썼지."

 

  나는 그들 역시 차례차례 단계를 밟아왔다고 말해 주었다. 그러자 그들은 무슨 단계를 말하는 것이니 라고 물었다. 케르테스는 설명했다. 우리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단계적으로 천천히 깨달아 나간다. 하나의 단계가 끝나고, 그것이 끝났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그 다음 단계가 다가온다. 그런 식으로 해서 마지막 단계에 이르면 그 사이에 일어났던 모든 일들을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 마지막 단계에 이르기까지 아무일도 안하고 가만히 있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일을 처리하고 살아가고, 움직이고, 활동을 하고, 매번 새로운 단계마다 요구되는 새로운 과제들을 수행해 나간다.그런데 만일 시간 속에 이러한 순서가 존재하지 않아서 우리가 이 모든 거을 한꺼번에 알게 된다면 우리의 머리와 가슴은 도저히 그것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다른 한편, 시간을 어떻게든 보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아니, 어쩌면 손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나는 게속 말을 했다. 어쩌면 아무 소용없는 말을 두서없이 늘어 놓았는지 모른다. 그래도 나는 계속 설명했다. 새로운 삶이란 없고, 언제나 예전의 삶을 계속 이어갈 뿐이라고. 나는 누구도 대신 걸어가 줄 수 없는 나의 길을 걸었다. 그것도 단정한 태도로 걸었다고 감히 주장할 수 있다. 이들은 왜 내가 지금껏 걸어왓던 모든 단계들과 이 모든 단정한 태도들이 함유하고 있는 의미를 깡그리 잊어버리기를 원하는 것일까? 어째서 갑작스레 이런 심경의 변화가, 어째서 이런 반항심이, 어재서 이런 불쾌감이 드는 것일까?      

                                                                  - 케르테스의 운명 中-

 

   이 책을 읽는 내내 핍박받는 유대인들에게서 북한 국민들의 고통과 고뇌가 투영된 까닭은 무엇일까?  대한제국에서 일제 치하로, 그리고 해방 후 바로 공산화가 된 북한엔 자유민주주의가 싹 틀 겨를이 없었다. '이런 국가에 사는 국민들은 과연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라는 의문과 자신의 군주(김정은)이 정해준 인생을 운명이라고 생각하며 그 순리대로 무감각하게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회의적인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더욱 나아가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조차도 운명론적인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 비일비재하지 않나. 수능을 못본 자신을 비관해 자살하는 사람들, 더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하는게 아니라 '될대로 되라지 뭐'라 하며 지금 위치에 안주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만나면 난 케르테스의 이 말을 전해주고 싶다.

 

만일 운명이 존재한다면 자유란 불가능하다

 

만일 자유가 존재한다면 운명은 없다

 

이 말은 나 자신이 곧 운명이라는 뜻이다

 

진취적인 삶을 살자.

 

이만 줄이고 다음 번엔(근무지에서 짬 타임이 생긴다면^^ 로마인 이야기 - 율리어스 시저 편을 쓰겠다!)

  1. 히틀러 내각의 친위대로 괴벨스, 히믈러, 카이텔 등 악명높은 나치 장군들이 포함돼 있는 친위대이다 [본문으로]
  2.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운명의 여신 3명: 클로토, 라케시스, 아트로포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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